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문단 편집) == 홀로코스트의 주도자 == [[파일:external/home.earthlink.net/kaltenbrunner.jpg|width=400]] 1941년 4월에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시찰에 나선 칼텐브루너(왼쪽)[* 참고로 키가 매우 크며, 뉘른베르크 재판당시 프로필상으로는 194cm이다. 일설에 의하면 200cm였다고 한다. 191cm인 하이드리히보다 컸을 정도이다.], 힘러(중앙)[* 힘러와 칼텐브루너 사이에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가 있지만 사진 구도상 거의 보이지 않는다. 힘러의 얼굴 부분에 미세하게 나와있다.]와 수용소장인 [[프란츠 치라이스]](오른쪽)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암살당한 뒤 독일경찰청장과 제국보안본부장에 임명되었고, 상급집단지도자와 경찰대장 칭호를 수여받아 [[게슈타포]]를 비롯한 독일 전역의 경찰력을 통제하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애주가였으며 주사가 심한 사람이어서[*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계속 오열을 해댔고 술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조금 불쾌해도 그러려니 하지만, 그곳은 독일임을 생각해 보자...] 매번 동료들이나 지인들과 술판을 벌이는 것을 일삼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이 거대하고 야비한 인간과 접촉하게 된 사람들은 그가 역겨운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독일의 퇴근문화는 바로 칼퇴근해서 바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 역할을 하는 공과 사가 뚜렷한 일할 땐 슈퍼맨, 가정에선 충실맨 문화인데, 이 상사이자 동료는 퇴근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회식을 하자고 하니 참 난감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 인간은 나치의 신념과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지인들은 증언했다.] [[빌헬름 카나리스]]는 "그는 차가운 눈과 살인자의 손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오스트리아 합병]] 후 파견되어 유대인 국외이주본부를 창설시 칼텐브루너는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칼텐브루너는 1943년 1월 31일까지 도나우의 지도자 직위와 친위대 경찰고급지도자 국가보안본부 장관직을 유지했다. 1943년 1월 30일에 칼텐브루너는 국가보안본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월 31일에 히틀러가 칼텐브루너의 국가보안본부 장관임명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칼텐브루너는 [[게슈타포]], 형사경찰, 나치 친위대(SS)의 정보부들을 이용하여 동부전선의 후방에서 나치 독일의 패망때까지 '''약 100만명을 살해한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은 학살 조직의 총 책임자가 되었으며''' 유대인 처리문제의 집행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학살로 유럽의 유대인 색출이 조직적으로 실시되었고 이로인해 '''무려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원래는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43년 봄과 여름에 걸쳐서 독일계 유대인의 말살계획 [[홀로코스트]]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치당 내에선 의외로 이런 일이 흔했다. [[헤르만 괴링]]도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같은 말도 해댔고, 유대인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죽이려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1944년 2월에는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실각과 더불어 그의 지휘 아래에 있었던 국방군 첩보부는 국가보안본부 제6국의 하부조직이 되었다. 1944년 3월에 “탄약포고“ 발령으로 미국인과 영국인을 제외한 도망한 전쟁포로는 국가보안본부의 보안경찰과 친위대에 인계되어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총살하게끔 했다. 1944년 3월에 독일군이 추축국에서 이탈하려 한 [[헝가리 왕국]]을 점령하자 칼텐브루너는 1944년 3월 22일에 헝가리로 건너가 '''유대인 처리 문제에 관여하여 유대인의 이송하고 말살하는 것을 빠르게 진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실제 작전의 지시를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맡겼고 '''아이히만은 칼텐브루너의 지시로 1944년 5월부터 6월 30일까지 약 38만 1,600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가운데 무려 24만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서 살해했다.''' 1944년 6월에 독일을 공습한 연합국 조종사 포로는 친위대에 넘겨져 고문 및 살해에 관한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칼텐브루너는 1944년 7월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에 의해서 일어난 [[쿠데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때에 관여했던 주모자와 가담자들의 재판과 처형에 대한 권한을 담당하여 관련자들을 무자비하게 색출하였고 색출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하여 '''약 200여명이 넘는 관련자를 제거하였다.''' 그 외에도 동료였던 [[오토 스코르체니]]와 스탈린과 처칠, 루스벨트 등 연합국 지도자들의 암살기도 작전이었던 롱 점프 작전을 입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위대 실권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는 계속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계급이 오르고 권력이 강해질수록 양자 간의 권력투쟁도 심화되었다. 12월에는 최종적으로 [[무장친위대]]와 경찰대장(General der Polizei und Waffen-SS)으로 승진, 사실상 [[힘러]] 다음가는 친위대의 실권자로 자리를 굳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